[스크랩] MBC라디오 여성시대 1999년 신춘편지쇼 은상 수상 글
MBC라디오 여성시대 99년 신춘편지쇼 은상 수상 글
♥ 우리 부부의 술 따르기 법칙 ♥ 글/하태수
저는 올 해 만으로 마흔이 되고 결혼 11년째인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담배는 3년째 끊고 있지만 술은 좋아해서 저녁에 집에서 반주를 즐깁니다.
운전을 해야하기 때문에 밖에서 술 마실 기회가 있어도 참고 있다가 집에 와서 마시다 보니 저녁식사 중에 곁들이는 반주가 습관이 되어서 일주일이면 서너 번을 집에서 즐깁니다.
기분 좋을 때는 소주 한 병 보통 때는 반병이나 두세 잔씩 마시는데 주량이 세지 못해서 많이 마시지는 못하지만 눈이 게슴츠레 얼근해지면 기분이 좋아지는 스타일이어서 일부러 아내는 안주를 준비해서 술을 권하기도 합니다.
아내와 두 딸들까지 세 여자가 번갈아 가며 술을 따라주는 분위기가 여느 술집보다도 기분 좋게 하기에, 분위기를 마시고 분위기에 취해서 사는 행복한 놈입니다.
물론 아내도 맥주 한두 잔씩 마실 줄 알기에 불그스레 홍조를 띤 아내의 얼굴이 더욱 사랑스럽고 예뻐 보이기 시작하면 애들은 여지없이 숙제나 일기를 핑계로 안방에서 쫓겨나곤 하지요.
이렇게 기분 좋아지는 술자리에서도 우리 부부가 오래 전부터 지키고 있는 것 하나는 서로가 술잔을 두 손으로 따르고 두 손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아내가 두 손으로 따르고 나는 한 손으로 받고, 내가 한 손으로 따르면 아내는 두 손으로 받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부부는 격이 같음을 강조하며 한 손으로 서로 따르자는 내 제의에 어색해 하던 아내도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른 상태에서 왼손을 다쳤을 때 병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 아내를 고생시켰던 생각이 나서 고맙고 미안한 생각에 왼손도 거들어서 두 손으로 아내에게 술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드릴 기계에 왼손이 너무 심하게 다쳐서 잘라내야 한다는 의사선생님의 선고에도 불구하고 네 번이나 대 수술을 해서 모양새 사납게 제자리에 붙어있지만 그 왼손까지 거들어서 위로해 주고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습니다.
"여보, 고마워!" 하면서 두 손으로 맥주병을 쥐고 잔을 권했더니 얼떨결에 두 손으로 잔을 받으며, "뭐 가요?" 하더군요.
"아니 그냥......, 이것저것 다......" 하면서 잔을 채웠습니다.
정말 정성스럽게 내 고마운 마음을 아내의 잔에 가득 채우고 싶었습니다.
내가 갑자기 두 손으로 술을 권하자 같이 두 손으로 잔을 받던 아내의 표정이 새로운 모습으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두 손으로 주고받게 되었고 이제는 시댁 식구들이나 처갓집 식구들 앞에서도 두 손으로 주고받는 게 자연스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두 손으로 아내의 술잔을 채울 때마다 아내의 존재 가치와 엄마로서의 역할을 아이들에게 일러주며 엄마에게 잘 대하기를 당부하기도 합니다.
내가 아내를 소중하게 대하고 존중하면서부터는 주위 사람들도 내 아내에게 내 태도에 따라 대하더라는 평범한 진리를 느끼고 있습니다.
부부는 같은 레벨이고 동격입니다.
상대를 낮추면서 내가 위로 보이는 게 아니라 상대를 높여주면서 나도 같이 격이 올라가는 관계가 부부임을 「두 손으로 받는 아내의 술잔」에서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