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친정집을 만들었습니다
내 아내는 친정이 없습니다
맏이면서 결혼후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세동생들이 언니네 집을 친정으로 생각하고
나도 외아들이면서 두 누나들이 우리 집을 친정으로 생각하며 살기에
명절이 되면 우리 집은 친정을 방문하려는 처제네와 누님들이 손님으로 북적였습니다
결혼후에도 다들 시댁에 갔다가 친정에 간다며 우리 집으로 모이는게 당연한 것처럼 되어서 제 아내는 차례지내고 그 손님들 맞이하는게 지금까지의 우리 집 명절 모습이였습니다
막내로 처남이 있지만 이제 가정을 꾸려서 오히려 우리 집으로 오니 아직은 처남네 집을 처가라거나 친정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결혼하고 올해로 19년째를 그렇게 명절을 맞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시댁이고 친정이고 부모님들이 아무도 안계시기에 아이들이 어릴 때까지는 차례지내는 우리 집이 쓸쓸하지 않게 찾아주는게 고맙고 반가웠는데 이제는 세 아이들이 다들 많이 장성해서 우리 다섯 식구만 차례를 지내도 집안이 꽉 차보이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몰려오는 손님이 부담스럽고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자기들은 친정이라고 와서 차려주는 음식에 먹고 마시며 뒹굴다가는데 그런 뒤치다꺼리를 명절때마다 해대야하는 아내가 안쓰럽고 불쌍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않아도 친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기가 죽는 아내이고 친정에 갔다왔다며 짐보따리를 자랑하는 모습에는 허전해하는 사람인데 장모도 아니고 친정어머니도 아니면서 역할만 해야하는게 마음으로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아내이기에 명절때만 되면 빚진 듯이 기분 맞추려 여러 가지로 애를 써보지만 그런다고 달라지겠습니까
그래서 작년부터 내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도 당신 친정에 가자”
“내가 친정이 어디 있다고 친정을 가?”
“친정을 만들어서 가면 되지”
“뭐~?”
“친정처럼 편하게 쉬었다 올 수 있는 곳을 만들어서 지금 갔다오자”
“손님들도 와 있는데 어딜 간다고 그래...”
“그냥 냅 두고 가자. 자기들도 친정에 왔는데 당신도 친정에 가면 되지”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도 아내의 얼굴이 확~ 펴지고 있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앞치마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며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친정에 가는데 이쁘게 하고 가야지~”
다들 집에 남겨놓고 둘이만 나와서 부평CGV영화관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타짜」를 보기로 하고 표를 사놓고서 시간이 여유로워서 핸드백 가게랑 바지가게를 들러서 간단하게 쇼핑도 하고 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팝콘을 한봉지 사들고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명절이라는 생각도, 집에 손님들이 있다는 생각도 잊고 정말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작년에 그렇게 친정집을 만들어 놓았으니 올해도 당연히 갔다왔습니다
손님들에게는 새로 만든 친정집에 갔다와야 한다는 설명과 함께 양해를 구하고 애들에게 음식 많이 있으니 알아서들 챙겨 드리고 놀고 있으라 했더니 다들 “우~워~” 환호성을 지르며 어서 다녀 오시라며 배웅을 해 주더군요
안가본데로 가자며 계양CGV영화관으로 가서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을 보고 왔습니다
심각한 영화나 드라마는 싫고 단순한 코메디영화라서 즐거웠습니다
영화관에는 추석 당일인데도 의외로 우리처럼 중년들도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사람들도 같이 친정에 왔나보다고 웃었습니다
아내에게 억지 친정을 만들어서 데리고 갔다온들 온전한 친정만큼 좋을리야 없고, 반가워해주는 친정 식구들이라고는 없지만 그렇게라도 해 주고 싶었습니다
연애때부터 지금까지 명절때마다 내 위주로만 지내왔고, 여름휴가때도 벌초행사로 휴가를 대신하고 말았지만 묵묵히 20여년을 자신보다는 나만을 앞세우며 내 곁에서 살아온 아내이기에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랬듯이 내년에도 친정에 가자고 할 것입니다
이쁘게 화장도 하고, 고운 옷으로 차려입고 가렵니다
-2007년 9월 27일 하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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